계엄 이후의 청년 때아닌 내란세력으로 인해 국가와 민주주의는 큰 위협을 받았지만, 시민과 시민사회는 연대의 힘으로 계엄 정국을 종식시켰다. 광장을 채운 시민들은 내란범이 체포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것에 만족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탄핵 이후 탄핵이 반복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명민한 행동과 전략이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특히 이번 겨울의 광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만들어나가는 중심 집단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시 ‘청년’이라 호명된 이들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주역이 되어, 형형색색의 응원봉으로 광장을 가득 메웠다. 여의도, 남태령, 한남동,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연대의 순간마다,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희망을 외쳤던 이들에게 세상이 주목했다. 그러나 기성의 질서는 그 누구도 ‘어떤’ 청년들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저 이들의 드러난 행동에만 열광했다.
청년은 누구인가. 청년은 단일한 얼굴이 아니다. 응원봉을 들고 광장을 주도한 청년들을 찬양했지만, 막상 고강도 노동, 불안한 미래, 치열한 경쟁 시스템까지 빈틈을 내기조차 어려운 사회에서 평일,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회 변화를 외칠 수 있었던 청년이 누구인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드물었다. 그 이면에는 전세사기로 인해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었고, 채용 성차별로 인해 여전히 취업을 준비하거나 포기한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이태원 참사로 가족과 친구를 떠나 보내며 안전한 세상을 꿈꾸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청년들에게 환호하고 응원을 보내지만,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을 경험하며 거리에 나서야 하는 청년들의 상황에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기력한 현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목소리를 외치고 있는 용기와 의지에 집중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광장에 선 이들 곁에는 광장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같은 마음으로 시대를 응시한 청년들이 있었다.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계엄 정국이 끝나고 새롭게 도래할 세상은 조금은 더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다수의 청년이 있다. 야근이 잦아서, 서울에 가기 어려워서, 아이를 키워야 해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집회에 나서는 청년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부양하며 노인복지의 부족함을 토로하는 세대주 청년, 서울로의 이주를 고민하면서도 고향의 소멸을 걱정하는 비수도권 거주자, 육아와 경력 단절의 이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아이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여성까지. 이들의 목소리를 이미 공동체의 내일을 담고 있으며, 광장의 외침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청년들은 지워진 채, 또다시 ‘청년팔이’는 반복되고 있다. 기성 사회는 자신들이 못한 변화를 만들어낸 청년의 외피만을 그저 찬양하고 서부지법 폭동으로 대표되는 일부 극우 청년에 분노하며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재생산하고 있다. 자극적이고 정쟁에만 기대는 프레임 속에서는 그 어떤 미래도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시기 똑똑히 경험하였다. 시민들의 열망이 좌절과 체념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내일을 향한 실질적인 틀과 실천이 필요하다.
내란을 넘어 ‘불평등’을 물어가는 범청년행동
‘윤석열을 물어간 범청년행동’은 시민과 함께 내란의 우두머리 윤석열을 파면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불평등을 물어가는 범청년행동’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새로운 이름은 파면 이후의 정치가 외면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선언이다. 우리는 내란을 끝낸 광장의 힘으로, 불평등한 구조를 뒤엎고 평등한 미래를 열기 위한 싸움에 다시 나설 것이다. 국가적 위기를 온몸으로 싸우며 수습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워지는 역사를 이번만큼은 반복하지 않고자 한다.
윤석열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그리고 청년 담론과 미래에 대한 논의도 퇴행시켰다. 기후위기 시대에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대응은 재생에너지에 대한 공격과 석탄화력발전소 및 핵발전소 추진으로 되돌아갔다. 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들은 인사청문회 때 부터 지금까지 성소수자 혐오를 일삼고 있다. 기후, 노동, 주거, 젠더, 의료, 교육 등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이 폐허가 되었다. 청년을 둘러싼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권은 소위 ‘이대남’, ‘이대녀’ 등으로 청년을 호명하며 자신들이 미래세대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 처럼 포장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온갖 차별과 혐오를 동원한 갈라치기일 뿐이었다. 이처럼 청년과 시민들의 불만을 마주했을 때, 진지하게 대안을 고민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 반민주적인 요구에 편승하는 주류정치의 모습이 최근 몇 년간 이어졌다. 윤석열의 내란시도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결여하고 단기적인 표 계산에 그치는 정치의 파국적인 결말이기도 하다.
내란 이후 새로운 한국사회는 내란세력의 청산 뿐 아니라, 노동, 젠더, 주거, 교육 등 불평등을 심화시켜온 흐름과 단절함으로서 열어낼 수 있다. 벌어지는 기업규모간 격차와 성별임금격차를 실질적으로 줄여가야 한다. 분절되어있는 노동시장을 방치하지 말고 청년 41만명의 “그냥 쉬었음”, 800만명의 비전형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가야한다. 또한 전세사기 피해 25,578건 중 74.5%가 청년 세입자가 당한 피해이다. 더 이상 세입자의 보증금이 손쉬운 약탈의 먹잇감으로 남아서는 안되고, 세입자에게도 평등하게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대안들을 논의해야한다.
더불어, 모든 형태의 차별과 혐오, 폭력이 사라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은 대선기간동안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여성가족부 해체 등 혐오에 기반한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극우 세력은 반이주, 반중국 정서를 선동하며 이주민을 희생양 삼아 물리적 폭력과 위협, 혐오 발언을 뱉어내며, 이들의 기본권과 존엄을 침해하고 있다. 국적, 출신, 신분을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사회가 내일의 세상에는 절실히 필요하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이 1.5도를 넘어선 지금,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니라 현재의 재난이 되었다. 재난은 농민, 저소득층, 이주민, 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게 가장 먼저, 가장 깊게 다가가고 있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과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회적 위기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기후정의와 생태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고 모두의 생존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연대와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청년 정책”은 어땠는가? 시민의 삶을 지지하는 공적인 자원을 확충하거나 평등한 사회구조를 구축하기보다, 각자도생을 위한 사다리를 놓겠다는 식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분양주택 예산을 증액했다. 청년들의 ‘내 집 마련’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수억원의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접근 가능한 차별적인 정책이었다. 집 때문에 건강과 생명을 잃는 구조는 방치하거나 악화시켰다. 또한 노동자들의 ‘노조 할 권리’에는 거부권을 행사하고, 노동시간을 69시간으로 늘린다면서 청년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척 했다. 불평등과 착취를 그대로 둔 채 “성장”과 “생산성”만을 앞세운 정치였다.
진정 ‘청년’이 미래를 담보하는 개념이라면, 불평등한 사회를 벗어나는 미래를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범청년행동은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서 평등한 민주사회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사다리가 아니다. 자산축적, 자기계발 등 “정상적” 생애주기를 지원하는 “사다리” 정책들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만, 실상은 격차와 차별의식을 강화할 뿐이다. 우리는 허공에 올라가기보다, 모두가 단단하게 딛고 살아갈 땅을 요구한다. 청년의 힘으로 불평등을 쫓아내고 평등한 민주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청년들이 직접 만들어가는 내일의 세상
범청년행동은 지난 123일 동안 광장 안팎의 청년들을 만나왔다. 내란 이후 12월, 두 번의 청년 사전집회를 열어 광장 속 불안에 떨던 청년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고, 각각의 일터와 삶터에서 일상을 버텨온 청년 100명의 목소리를 모았다. 거리와 광장에서 함께 민주주의를 외쳤고, 전국 각지의 현장을 돌아다니며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또한 청년 시민들은 비상계엄이 선포된 직후 장갑차를 막아서는 용기부터 시작해서, 국회 앞에서 응원봉 집회 문화를 만들었고, 남태령에서 농민과 함께 트랙터의 길을 열었으며, 한강진에서 인간 키세스가 되어 폭설의 날씨를 이겨냈고, 몸과 마음이 시린 겨울 내내 광화문 거리를 지키며 드디어 탄핵의 봄을 맞이하였다. 광장에 나오지 못한 이들도 응원, 지지, 후원으로 함께 마음을 보내며 연대했다. 두려움과 공포, 분노와 피로가 뒤섞인 시간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며 함께 버텼다. 지난 123일 간 우리는 탄핵 이후의 세상을 꿈꾸며 각자의 자리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거리에서 123일을 보내야만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란에 가담한 이들은 단호히 처벌하고, 이를 비호하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그런 민주주의는 없다고 단호히 맞서야 한다.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가 훼손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내란세력 척결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드는 일에 나서고자 한다.
청년들은 더 이상 ‘자원’으로만 불리는 걸 거부한다. 필요할 때만 호출되는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직접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주체로 나서고자 한다. 우리는 윤석열 파면을 이뤄낸 광장의 중심이었다. 다음 세상을 만들어나갈 준비가 이미 되어 있고 앞으로도 주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자리에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에 대한 확신이 있다. 우리는 청년의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 대신 긍정과 확신을, 타인에 대한 불신과 각자도생 대신 신뢰와 연대를 회복할 것이다. 범청년행동의 활동은 그러한 미래에 대한 작은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대통령 선거라는 과정은 투표로서 평가하는 자리이면서도 다음 세상의 정책을 토론하는 공론의 시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특정 정당이 당선되는 차원을 넘어, 우리가 이야기했던 가치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역할을 다해보고자 한다. 이는 광장 안팎에서 외쳤던 목소리들이 승리하는 것이고, 마침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우리 곁의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거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평등과 차별의 종식을 꿈꾸는 청년들이 정치의 시간에서 온전한 주체로 설 것을 다짐한다. 단순히 시혜적인 요구를 넘어서, 당사자이자 전문가이자 시민으로서 정책을 만들고 정치에 참여하고 연대를 이끌어내는 실천을 해나갈 것이다. 불평등을 제대로 물어가는 범청년행동의 시간을 펼쳐보고자 한다. 이 감각을, 이 관계를, 이 시간을 우리의 미래로 만들자. 다음 세상은 이미 와 있다. 이제는 그것을 더 이상 미루지 말자. ‘나중에’는 없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상을 바꾸자.